우선 저는 ‘산천어 축제’를 ‘원래 살지 않던 외래종을 들여놓는 것’에 따른 문제, ‘하천을 공사하여 원래 사는 종의 서식지를 교란’, ‘동물에 대한 잘못된 가치관을 미래세대에게 교육하는 것’에 대한 문제 등을 이유로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저와 입장을 공유하는 산천어 축제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최근 산천어축제를 넘어 '낚시행위' 자체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모든 행위는 학대이고, 낚시도 물고기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에 낚시는 학대이다. 동물 학대로서의 낚시와 산천어축제를 반대한다”
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산천어축제를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낚시 행위 자체에 대한 비판적인 논조의 글과 기사가 나오고, 이런 주장에 공감하는 의견들이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에는 물고기를 주제로 한 대중서에 인용된 소수의 연구가 그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산천어 축제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공유하기 때문에 이런 활동의 배경에 있는 분들과 의견을 조율하기 위해 토론을 해보았지만, 돌아온 건 저와 비판자들에 대한 선민의식 섞인 조롱과 인신공격뿐이었습니다. 이에 그들과의 정상적인 토론보다 더 많은 분들과 논의를 해보고자 블로그에 이렇게 글을 올려봅니다.
만약 낚시가 학대로 규정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아마도 우리가 자연에서 물고기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활동에 제동이 걸리게 됩니다. 우리는 물속에 사는 수많은 생물들을 낚시를 통해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러기에, 미리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동물 학대의 정의는 ‘동물에게 장기적인 고통을 주고 최종적으로 죽이는 행위'로 한정해야 합니다. 그 이유를 아래에 설명해보겠습니다.
우선 낚시 행위를 정의해야 겠습니다. 낚시는 영어로 fishing이며 이는 족대, 손, 그물, 투망, 작살 등 온갖 방법으로 물고기를 잡는 것을 통칭하는 표현입니다. 흔히 생각하듯 바늘 낚시만이 낚시의 정의에 들어가진 않습니다. 그리고 바늘 낚시가 아닌 다른 낚시로도 물고기는 고통과 상처를 경험합니다. 여러분이 족대를 들고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게 바늘 낚시 이상으로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만약 상처와 그에 따른 고통의 유무만으로 학대로 규정한다면, 넓은 의미의 물고기를 잡는 행위는 모두 학대 행위로 규정될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저는 물고기를 연구하면서 손그물(족대, 뜰채)과 바늘로 낚시를 합니다. 불행히도(?) 아예 물고기를 잡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덕업일치의 고통). 저는 물고기들이 입는 고통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가능하다면 그물을 이용한 낚시는 지양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늘 낚시보다 물고기에게 더 큰 고통을 준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낚시가 한 마리의 물고기를 잡아낼 때, 그물질은 물속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수많은 물고기들을 다치고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아마 족대로 물고기를 잡아본 분들은 저의 이 표현에 과장이 없음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가능하다면 바늘 낚시나 뜰채로 그물 사용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더 물고기에게 고통을 덜 주는 방법일 테니까요.
뿐만 아니라 저는 바늘 낚시가 초래하는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합니다. 일단 연구대상종(납자루과의 물고기)이 손가락 몇 마디 정도로 작으므로 물고기 입에 박히는 바늘 길이는 1mm 정도로 작은 것을 사용합니다 (사진 참조). 손가락에 찔려도 각질에 걸려서 사람에게도 치명적이지 않은 수준입니다. 그마저도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갈고리처럼 생긴 미늘이 제거된 바늘을 씁니다 (사진 참조). 저는 이 방법으로 낚인 물고기를 어항에서 길렀을 때 단 한 마리도 바늘의 상처로 인해 죽는 경우를 보질 못했습니다. 트라우마도 없어서 다음날부터 사료를 받아먹는 행동을 보여주었으며, 오랜 기간 동안 문제없이 길렀습니다.
위의 사례는 비단 저 만의 사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물고기와 자연에 미치는 피해와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물고기를 잡은 뒤 관찰하고 그 자리에 놓아주는 ‘캐치엔릴리즈’는 물고기를 낚시를 통해 관찰하는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문화입니다. 이 사람들은 물고기에게 잠시 동안의 귀찮음과 고통은 주지만, 이들은 물고기를 공부하고 이해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물고기를 잡아야 하며, 그러한 낚시는 그들이 보다 물고기에 빠져들고 보호활동에 나서는 밑거름이 되었음을 부정하긴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낚시는 학대’ 라는 단순한 명제는 위와 같은 실천들과 산천어 축제장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학대행위들, 이를테면 바닥에 던져놔 죽여가거나, 입으로 물거나 아가미에 손을 넣어 호흡기관을 파괴해 서서히 죽여가는 행위를 똑같은 수준으로 평가합니다.
백번을 양보해서 어떤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것 자체가 학대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다시 말해 학대의 정의를 ‘잠깐의 고통을 주고 최종적으로 생명을 앗아가지 않는 것’까지 확대 해석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인간이 강과 바다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활동이 제한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활동들로 인해서 물고기가 고통을 받기 때문입니다. 강은 물고기의 삶의 터전이고 그곳을 우리가 인위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그들의 서식처를 교란할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죽음의 원인이 됩니다.
그런 주장을 하거나 동의하는 분들은 여러분의 밥상에 올라오는 동식물이 어디에서 유래했고 그 과정에서 어떤 동물의 고통이 수반되었는지 상기해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재미로 물고기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에만 국한한다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반박하실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재미의 정의는 무엇이고, 그 기준은 누가 판단하는가?”라고 되묻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채식을 하며 동물(물고기 포함)에게 가하는 고통을 주지 않는다고 즐거움(즐거움=만족감=재미)을 느낀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채식을 위해 매립되고 농지로 개간된 배후습지와 농지 그리고 농사 과정에서 강으로 유입되는 현탁물질과 질소 인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게다가 논과 밭을 위해 이용되는 용수확보를 위해서는 물을 가둬야 합니다. 댐 혹은 최소한 수중보라도 만들어야 합니다. 물고기들의 이동통로는 단절되고, 하천의 구조가 변형되며 결국 물고기들은 고통을 받게 됩니다. 채식을 하며 동물을 보호한다고 믿는 분들께서는 이런 상황을 인식하고서도 과연 채식이 진정 동물에게 이로움을 준다고 여기시는지요? 채식을 통해 얻는 심리적인 만족감은 결국 재미에서 오는 즐거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본인의 즐거움을 위해 물고기에게 고통을 주는 것 아닌지요? 인간은 삶을 영위하면서 크고 작게 모든 생물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것을 재단하고 막을 수는 없습니다. 재미는 정량할 수 없는 주관적 개념이므로 재미로 고통을 주는 행위로 동물 학대를 규정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산천어 축제에 대해 어떤 비판을 할 때는 낚시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고통의 최소화에 그 목표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고기를 잡고 이용하되 그들이 받는 고통과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책임있게 이용하는 방향을 고민해야 합니다. 낚시를 ‘학대’로 확대 해석하며 낚시에 대한 반대로 논의가 연장되는 것은 선민의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와같은 선민의식에 기반한 동물보호론은
대중들의 반발을 초래하며 오히려 산천어 축제에 대한 비판적 논의의 본질을 왜곡시킬 것 입니다.
다시 요약 정리하자면, 동물 학대는 어디까지나 동물의 고통을 불필요하게 연장하면서 종국에 죽이거나 사망을 유발하는 행위로 국한하여야 합니다. 고통을 지속적으로 유발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는 낚시마저 학대로 규정할 경우 인간이 강과 바다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25년 동안 강과 바다에서 물고기를 채집해 기르고, 낚시하고, 연구해온 전문가로서 드릴 수 있는 확신입니다.
더욱 갈등과 혼란이 증폭되기 전에 지금부터라도 학대의 본질에 대한 일방적인 주장이 아닌 소통과 토론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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