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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담 ━

당신이 페이스북을 탈퇴해야 하는 이유와 페이스북을 끊은 1년 후기

by 하늘종개 2021.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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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미디어의 문제점을 조명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딜레마>

 

들어가며

아무리 훌륭한 도구라도 그 사용자의 성질이 그 도구를 뒷받침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사용되긴 어렵다. 누군가는 게임을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잠시 사용하지만, 누군가는 늪에 빠진 듯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소셜미디어 역시 누군가는 타인과의 교감을 나누며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할 도구로 활용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용용도와 다르게 소셜미디어의 늪에서 자신을 잃고 헤매게 된다. 그리고 이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소셜미디어는 사용자 간의 소통만을 위해 설계된 공익적 플랫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례로 페이스북은 시가총액이 전세계에서도 최상위에 랭크된 거대기업인데, 그들이 자신의 수익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사용자의 이탈과 절제를 바랄까? 사용자의 중독적인 사용을 기대할까? 답은 우리 스스로 자문해봐도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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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우, 2010년부터 페이스북 활동을 왕성하게 해오며 페이스북의 문제점을 직접 경험했고, 더는 나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면 안된다 판단한 2019년 말부터 페이스북 활동을 줄여나가, 2020년 새해를 기점으로 10년 동안 활동해온 페이스북에서 탈퇴하였다. 2021년 새해를 맞이한 지금은 페이스북 활동을 완전히 접은 지 1년째가 되었다. 페이스북을 내 인생에서 멀리한지도 1년이 지난 지금 그동안 소셜미디어 특히 페이스북을 활동해오며 느낀 위험성과 한계 그리고 탈퇴후 1년 동안의 변화와 소회를 여러 사람들과 공유해보고자 끄적여 본다. (물론 현재도 인스타그램과 트위터를 사용중이다. 다만, 페이스북을 할 때만큼 왕성하게 활동하진 않는다. 인스타그램은 사진공유, 트위터는 학술 정보 공유를 위해 제한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접속 빈도로 보면 하루 10분 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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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을 탈퇴한 이유 일곱가지

⭐︎ 타인의 평판에 집착하게 된다.

아마 페이스북을 오래 해본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피로감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피로감의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갈증에서 비롯된다. 그 누구도 타인의 무플과 무반응을 기대하고 페이스북 활동을 하진 않으며 페이스북에 올리는 포스트는 타인의 반응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피드백에 대한 갈망은 늘 내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나의 행복에 대해 반응해주지 않는 것에 무감각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한껏 꾸미고 단장했는데, 아무도 당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면 기분이 좋을 리 없지 않겠는가? 

 

이 갈증과 불만족의 연쇄작용은 피로감을 유발한다. TV시리즈 <블랙미러>의 에피소드 <추락, Nosedive>에서는 타인의 호감을 갈구하는 소셜미디어의 이런 특성을 잘 풍자해내고 있다. 타인의 반응을 기대하며 소셜미디어에 몰입된 대부분 사람들의 몰락을 그려내고 있다. 나는 이 몰락이 대부분의 소셜미디어 사용자들의 현실이자 미래라 생각한다.

 

 

사람들과 소통하라고 만들어진 소셜미디어이지만, 페이스북을 하며 당신은 깨닳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고 동시에 남에게 무관심한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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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남의 불행을 탐닉하고 타인들 또한 당신의 불행에 집착한다.

당신의 수많은 포스트 중에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당신이 관련된 '루머'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벌어진 중립적이거나 부정적인 사건에 대놓고 반응하지 않더라도 기억한다. 당신이 당한 부당한 일이나 당신이 얽힌 문제들은 흘러서 사라지지 않고 타인들의 기억 속에 박제되어 당신의 약점으로서 재활용된다. 우리의 마음은 좋은 소식보다 루머에 더욱 집착하며, 이는 우리의 본성이라는 것이 많은 사회과학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다. 이 연구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들이 주변인의 구설수에 대해 그 무엇보다 잘 기억하도록 편향된 존재임을 보여준다.

 

소셜미디어는 루머를 양산하거나 확대시키는 통로로서 사용자 모두에게 불행을 선사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누군가는 '소셜미디어로 좋은 일들을 공유했을때 축하와 격려는 힘이 되지 않느냐'고 변호할지 모른다. 물론 그것은 분명한 순기능이며, 이것 조차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문은 들지 않는가? 왜 축하와 격려는 당신에게 직접 하기보다, 타인들이 보는 공간에 하는 걸까? 애석하게도, 사람들은 누군가의 출세와 같은 희소식에 대해 한 점의 티끌 없이 상대방을 성원하지 않는다. 작게는 당신의 희소식을 자신의 발전을 위한 자극제로서 소비하거나 크게는 그들 자신의 수면을 방해할 정도로 질투를 유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최근 들어 신경정신과 상담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불면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소셜미디어 사용을 단축하길 주문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스마트폰 이용자가 잠들지 못하는 이유는 화면에서 나오는 빛의 세기로 인해 수면을 촉진하는 멜라토닌의 분비가 억제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셜미디어에서 접하는 타인들의 모습에 탐닉하고 질투하는 것이 더 큰 요인이다. 당신과 우리 대다수를 갈증하게 만들고 비교하게 만드는 소셜미디어를 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당신이 진정으로 타인들의 행복을 축하할 줄 아는 인성을 지녔다면, 소셜미디어 활동은 당신의 정신건강에 있어 티끌만큼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소셜미디어에 계속 남아 활동하길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과연 몇 %나 될까? 남의 행복에 질투를 느끼거나 자신을 비교하위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죄인도 악인도 아니다. 반대로 남의 행복을 한점의 질투나 시샘없이 축하하는 사람들이 천사나 성인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놓여진 환경과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당연하게도 과도한 밀도의 집단에 속한 개체들의 경쟁과 높은 치사율을 유발한다. 실제로 작은 개울에 높은 밀도로 사는 물고기들은 높은 사망율을 갖는다. 그 사망율은 경쟁에서 비롯된다. 밀도가 낮아서 경쟁에 대한 압력이 낮은 집단은 다른 개체를 의식할 필요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배부르게 먹고 살고 번식에 참여해 다음 세대를 대물림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치열하게 다른 개체를 의식하고 견제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는 물고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나는 어느 외계행성에 가서 그 행성의 생명체 집단을 연구한다고해도 이 현상은 동일하게 재현될 것이라 장담할 수 있다.  

 

우리는 경쟁이 만능이라고 칭송받는 환경에 오랜 세월 노출되어왔으며, 모든 생애의 순간을 상대적인 비교우위를 위해 투쟁해왔다. 남이 나를 제끼면 분하고, 남을 제끼며 희열을 느낀다. 오죽하면 사촌이 땅사면 배아프다는 옛말이 있겠는가? 인생의 매 순간순간을 제로섬게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아오고 세뇌되어 왔는데, 어떻게 타인의 행복과 성공을 진심으로 성원할 수 있겠는가?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한 평생 살아왔고, 결국 생애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사람들조차도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픈 건 우리의 본성"이라는 명제를 부정하지 못한다. 이런 문화적 배경을 공유하는 사회에서 타인의 행복은 나의 불행으로 귀결된다고 믿는 수많은 개인들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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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프라이버시는 더이상 당신만의 것이 아니다

소셜미디어의 개발자들은 당신으로부터 이익을 뽑아내기 위해 막대한 인프라를 쏟아부어 소셜미디어를 운영한다. 이를 위해 당연하게도 당신의 개인정보는 최대한 추출되어야 한다. 그 프라이버시 정보가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을까? 답은 단언컨대 '아니오'다. 이미 몇 차례 발생되었던 프라이버시 유출은 소셜미디어의 숙명과도 같다. 소셜미디어를 지배하는 관리자들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당신으로부터 비롯된 정보들이 유출되는 것에 굉장히 애매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최근 사용자 정보 수집에 대한 페이스북과 애플 사이의 갈등도 이를 잘 대변한다. 내 개인정보는 철저히 암호화되고 어느 타인 혹은 기업도 그 정보에 직접 접근하지 못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만약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개발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을 소셜미디어에 중독시키고 당신에게 돈을 버는 방법은 아주 단순명료할 것이다. 우선 당신을 중독시키고, 그 다음 당신의 개인정보와 신상이 유출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그 개인정보를 광고주에게 제공하며 광고주로부터 돈을 버는 것이다. 

 

광고주에게는 수요층을 파악하는게 중요하다. 더 나아가서 수요층이 주머니를 열 이유를 만들어주면 더욱 좋다. 사람들의 소비는 대부분 '결핍'과 '스트레스'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사용자의 결핍과 스트레스를 유발함과 동시에, 사용자로부터 추출된 개인정보를 바탕으로 '맞춤형' 광고를 제공하는 플랫폼은 광고주 입장에서 분명 매력적일 것이다. 소비할 이유를 만들어주고, 동시에 잠재적 소비 대상을 정확히 타겟팅해주는 서비스는 소셜미디어 말고는 없지 않을까?

 

여기까지 설명하면, 혹자는 과대망상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소셜미디어는 당신을 고의건 아니건 간에 당신의 스트레스를 강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을 여기까지 읽었다는 것 부터가 소셜미디어로부터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아왔다는 의미 아닐까?). 스트레스를 강화시키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누군가의 성공과 자랑을 당신의 타임라인에 노출시키며, 상대적으로 당신을 비교 하위로 만들어 당신을 우울감에 빠트리면 된다. 내가 페이스북을 운영하는 '냉혈한'이며 돈에 눈이 먼 사람이라면 이 전략을 주저없이 사용할 것이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주머니를 열기 떄문이다. 스트레스로부터 탈출할 탈출구로서 맞춤형 광고가 제시하는 상품을 소비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그 상품은 당신으로부터 수집된 성향과 활동을 근거로 제시될 것이니 당신의 주머니는 열리기 더욱 쉬울 것이다. 아마 소셜미디어를 오랫동안 해온 사람들은 아래와 같은 생각을 한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에이 기분도 안좋은데 마침 광고도 하겠다. 저거나 한번 사볼까?" 

여기까지는 장사치의 애교로 봐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맞춤형 광고에 내 개인정보가 유출된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 있다.

 

나는 아래 설명할 몇 가지 경험적 실험을 통해 내 개인정보가 유출되고 있다는 것에 어느 정도 확신을 하고 있다. 그 시작은 어떤 사건에서 비롯되었는데, 어느날 소셜미디어에서 특정 제품의 광고가 부자연스럽게 연속적으로 노출되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생각을 되짚어보니, 그 제품은 내가 지인과 오프라인상에서 대화하며 언급했을 뿐, 구글링을 한적도 없고, 더욱이 그 제품은 내가 평소 사용해온 것이 아니며, 내가 사용할 가능성이 0에 수렴하는 내 성향과 정반대의 제품이었다.

 

처음에는 우연이겠거니 생각했다. 과학자로서 호기심이 동해 어느 날은 간단한 실험을 설계해봤다. 의도적으로 내가 사용하지 않고 사용할 의향도 없는 제품(예를들어 아기용 기저귀) 에 대해 대화를 통해 반복적으로 언급했고, 그 결과 그 제품은 광고로 제시되고 있었다 (재미난 점은 이 정보 수집은 영어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영어로 대화한 제품은 노출되지만, 한글로 언급한 제품은 광고로 제시되지 않았다). 그리고 상대방과 나는 서로 다른 운영체제 기반 스마트폰 상에 페이스북 어플이 설치되어 있었다. 

 

과학자라는 직업을 가져서 좋은 점은 매사에 의심과 비판을 일삼는 '회의주의'와 '증거'를 중시하는 훌륭한 덕목을 (반강제로) 심어준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개인적으로 '의심없는 과학자'는 '도자기 못 빚는 도공'이나 다름 없다고 본다). 몇가지 상황을 조성하여 상품 광고가 노출되는지와 더불어 그 광고가 어떤 상황에서 더 잘 노출되는지도 살펴봤다. 놀랍지 않게도, 영어로 언급한 제품은 광고로 여지없이 등장했으며,  내가 오래 머물면서 내가 피드백을 남기지 않는 포스트의 전후로 광고가 더욱 잘 노출되는 것을 발견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이유는 자명했다. 오래 머물지만, 피드백을 남기지 않는다는 건 내가 그 포스팅을 한 당사자에게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감정적 동요는 다시말해, 스트레스이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는 소비와 직결되므로 스트레스가 발생되는 지점이야 말로 상품광고를 위한 적절한 타깃일 것이다. 한 가지 추가 실험을 더 진행했다. 방문을 하고 오래 머물지만, '좋아요'나 '댓글'을 남기지 않았던 특정인에게 어느 날부터 피드백을 남기기 시작했다. 도리어 그 사람의 포스팅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음에도 그 특정인의 포스팅 전후로 광고의 노출 빈도는 감소되었다.

 

물론 위에 언급된 나의 사례는 우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세번 이상의 독립적인 상황에서 반복되는 것을 관찰했다는 점에서 나는 이 실험을 신뢰한다. 어느 정도의 확신이 들었을 때, 더 이상의 개인정보가 더 유출되는 상황을 막고자 나는 페이스북 앱을 스마트 기기에서 즉시 삭제 했다. 그리 놀랍지 않게도 페이스북 앱은 적지않은 용량을 차지했다. 기능은 결국 웹앱과 큰 차이가 없는데도 큰 용량을 차지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게다가 사용시 많은 메모리와 데이터를 소비하는 이유는? 판단은 이 글을 읽는 분들께 맡기겠다.

 

프라이버시 유출의 대상은 나와 우리를 가리지 않는다. 세상엔 모르는게 나은 상대방의 정보들이 적지 않다. 나는 페이스북을 하면서 내가 알고 싶지 않았던 타인의 개인사와 개인정보를 알게 되는 것에 놀라곤 했다. 이처럼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미디어에는 당신의 정보가 더이상 당신것만이 아닐 가능성을 높인다. 소셜미디어 플랫폼 개발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자녀 혹은 본인의 소셜미디어 사용을 통제하는 이유는 왜 일까? 나는 소셜미디어가 야기하는 프라이버시 유출이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셜미디어의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부분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딜레마>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의 시청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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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스북은 일방소통만이 가득하다

많은 사람들은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미디어가 소통을 위한 훌륭한 도구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 소통의 방향성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쌍방소통이 아닌 일방소통에 가까운 것을 볼 수 있다. 역설적으로, 소셜미디어를 일방소통의 도구로 활용하는 사람들은 소셜미디어에서 더 잘 살아남는다. 일례로,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는 인플루언서의 포스트에 당신은 열성적으로 반응해주지만, 상대방은 그에 대해 항상 피드백을 주던가? 이런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좋아요’를 받는 사람과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은 비대칭적이다. 역설적이지만, 이런 불균형은 소셜미디어의 성장을 견인해왔다. 만약 모든 사람의 발언과 포스트가 동등한 평가를 받는다면 사람들은 소셜미디어를 할 이유가 없기 떄문이다. 누군가는 결핍되고 궁핍해야만 더 열성적으로 활동한다. 

 

나는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자 소셜미디어를 시작했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만나게 된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닳게 된다. 내 주장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내 발언을 알지 못하고, 상대의 발언을 나는 기억하는 묘한 상황들이 반복되었다. 쌍방의 소통이 일어나지 않는 사례는 소셜미디어를 하며 일상적으로 맞이하게 된다.

 

이런 상황들을 자주 마주하며 얻은 결론은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미디어는 소수의 인플루언서들의 일방소통을 위해 최적화된 공간이라는 것이다. 일방소통의 이점을 누리는 방법은 바로 인플루언서가 되는 것이다. 페이스북은 그런 인플루언서들의 글을 더 노출시켜주고 퍼져나가도록 한다. 이는 은근히 사용자들을 인플루언서가 되도록 압박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런 식으로 등을 떠밀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일방소통은 나에게 독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비록 소수일지라도 다른 사람과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소통하는 것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풍요속의 빈곤보다는 적지만 확실한 인연들간에 소통이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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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을 도구화하는 이들의 빈도가 높다.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경험임을 전제한다. 소셜미디어를 도구로 매우 잘 활용하는 사람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타인들을 조종하고 선동하고 활용하는데 능숙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탁월한 카리스마로 주변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그들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팬덤을 만든다. 나는 이런 사람을 소셜미디어가 태동하기 전인 인터넷 보급 초창기부터 경험했으므로 이들의 생리를 잘 파악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을 오프라인에서 만나보고 교류하며 많은 시행착오를 해본 결과 내린 결론은 "이들은 타인을 이성을 갖는 존엄한 존재가 아닌 도구로 대하는 소시오패스적 성향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소셜미디어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을 들여다보면 무언가 소름돋는 느낌을 받은 적이 종종 있다. 그들은 대개 공감능력을 훌륭히 연기해내지만, 이따금씩 자신의 연기가 드러나곤 한다. 일례로 페이스북에서 인플루언서인 몇몇 인물은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재난 상황을 목도하고도 지인들과 술판을 벌이는 사진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게시하곤 한다. 가까운 지인의 부고에도 불구하고 친구와 파티를 벌이는 사진을 본 적도 있다. 몇 분 전까지 애도하고 상황에 분노하던 그들의 진심은 무엇일까? 

 

여전히 페이스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한번 주변을 둘러보길 권한다. 소위 인플루언서라고 불리우는 사람들 중에 이 사회에서 100명 중 네다섯 명 출현한다는 소시오패스적 성향이 인플루언서의 몇 %에서 나타나는가? 내가 페이스북을 탈퇴할 당시 계산해본 결과에 의하면, 소위 인플루언서라고 할 만한 사람들의 50% 가까이가 소시오패스 유형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권위, 학벌, 카리스마, 외모 등을 과시하며 타인을 비교하위로 끌어내리며, 자신의 프로파간다를 세뇌시키고 궁극적으로 남을 조종하려 하는 반면, 타인에 의한 변화를 한치도 허용하지 않는 경이로운 자기애를 갖고 있었다. 그들과 정상적인 의미의 소통이 가능할까?

 

다시말하지만, 그들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상호간 소통하기 위해 소셜미디어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고 상대방을 통제하고 그것을 위한 취약점을 수집하고, 프로파간다를 세뇌시키기 위해 소셜미디어를 도구로 활용한다. 이것은 진정한 소통도 아니고 건전한 사회적 활동이라 볼 수 없다. 소셜미디어를 도구로 영리하게 활용한다는 것은 다시말해 그들은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으면서, 타인을 이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걸 능숙하게 해내는 사람들이 당신의 타임라인을 지배하며 당신의 자존감을 떨어트리며, 조종하고 이용하려 한다.

 

한편, 소셜미디어에서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은 그 과시로 인해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갖게될지 알면서도 자신을 과시하는 '관종(관심종자)'이다. 오해를 방지하고자 재차 강조하자면, 내가 여기서 논하는 관종의 의미는 그저 자신을 과시하길 좋아한다는 의미를 넘어 그 과시하는 당사자로 인해 사람들이 느끼는 피로감을 무시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비슷한 의미로는 노출증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내가 남을 통제할 수 없고 남도 나를 통제할 수 없기에 이런 관종들은 소셜미디어에서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듯 자신을 과시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과시할 소재가 고갈되면 어떻게 될까? 결국 허언과 허세로 자신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소셜미디어에서 하는 허세와 자랑은 오프라인보다 그 파급력이 크고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깊은 피로감을 준다. 이 피로감의 늪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답은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사족이지만, 앞으로 소셜미디어의 사용자들은 자신을 과시하는데 집착하는 노출증 형 사용자와 침묵하며 엿보는 관음증 형 사용자로 양극화될 것이라 예상한다. 

 

당신을 착취하고 자존감을 떨어트리는 자들이 우글대는 소굴이 되어버렸는데, 그런 곳에 왜 머물러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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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번 이어진 인연을 끊기 어렵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소셜미디어에서 내게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문제적 사람들을 숨기거나 차단하고, 심지어 친구를 끊으면 되는것 아니냐"

하지만, 이 방식으로 대처하는 것도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우선 당신은 그들의 카리스마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숨기거나 차단을 하더라도, 역설적으로 당신은 그들에 대한 관심을 끊을 수 없다. 정작 그들은 당신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지만 말이다.

 

또한, 페이스북은 (고맙게도?) 당신의 인연이 줄어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 다른 소셜미디어와 달리 페이스북은 상대방의 차단과 친구끊기에 대해 쌍방이 인지할 가능성을 높인다. 실제로 나는 도저히 성향이 맞지 않는 몇 명을 차단했을 때 머지 않아 상대방이 인지하는 불편한 상황에 처하곤 했다. 차단한 상대방과 나 사이에 공유되는 친구들에게 당신과 상대방을 번갈아가며 노출되니 상대방은 당신이 친구를 끊었거나 차단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고, 차단된 것을 확인한 그들은 나를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차단된 당사자 뿐만 아니라 공공연하게 당신의 네트워크에 전체적으로 알려질 수 있다. 이것은 당신의 평판에도 부정적 영향을 주어 결과적으로 당신의 처지를 곤경에 빠트릴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사람들은 당신과 누군가의 불화에 관심이 많다. 이런 점을 인지한 사람들 중 일부는 페이스북 친구들을 끊지 않고 탈퇴 후 새로운 계정으로 재가입해 친구 목록을 갱신하곤 한다. 하지만, 이것은 미봉책일 뿐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는다. 당신이 새로이 가입해도 기존의 네트워크에 편입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한번만 해본다면, 당신은 절대로 한번 맺어진 친구를 쉽게 끊을 수 없을 것이다. 소셜미디어를 계속하는 한 불편한 동거가 계속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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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극적인 가짜뉴스가 범람하고 사이비가 진짜로 대접받는다.

페이스북의 사용자가 2010년대 중반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입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문제점 중에 하나가 있다. 그것은 페이스북에 온갖 가짜와 사이비들이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이다. 과학에 대한 존중이나 기초도 모르는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가짜 뉴스를 퍼트리며, 학문적으로 존경받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 자화자찬하는 모습이 타임라인을 도배한다. 그런 현상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페이스북의 인플루언서로 자리매김한다. 합리적 근거에 기반한 팩트보다 학벌, 외모 등의 매력을 갖춘 인플루언서가 내뱉는 근거 없는 주장이 더 영향력 있는 것이다. 반면, 진정으로 존경받아야 할 사람과 가치관은 소셜미디어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오랜 고민과 연구로 정제된 발언보다 자극적이고 왜곡된 발언들이 더 소셜미디어에 효과적이란 사실을 경험했을때 소셜미디어에 대한 회의감은 극대화되었던 것 같다.

 

위의 일곱가지로 인해 나는 1년 전 페이스북을 탈퇴하기로 결심하고 실행했다.

소셜미디어를 탈퇴하고 1년동안 일어난 변화 - 참된 인연의 복원

사람들은 외로움과 단절을 싫어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주변에 여러 사람들을 두길 희망한다. 하지만 이런 바람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고 생애를 정리하면서 정리되는 것 중에 하나는 인연이라고들 한다. 우리는 결국 손에 꼽을 사람들과 친밀한 삶을 살아간다. 나는 그 시점을 조금 더 앞당기기로 했다. 

 

결심에도 불구하고 페이스북을 탈퇴하며 아래와 같은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페이스북의 적지 않은 인연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사람들과의 인연이 단절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결심을 굳혔다. 확신의 이유는 간단하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나를 찾을 것이고 나 또한 그들을 찾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1년이 지나며 실현되고 있다. “정말 나를 필요로 하고 나를 그들의 머릿속에 담아두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어디에 있을지라도 나를 생각하고 찾아온다. 뿐만 아니라 나 또한 내 마음에 깊숙히 박혀 있는 참된 인연을 되새기게 되었다. 소셜미디어를 탈퇴해서 좋은 점은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기회를 통해 내 주변에 나를 이용하고 착취하려 했던 사람들을 정확히 걸러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소셜미디어가 제공하는 무궁무진한 인연의 잠재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로 했다. 

"나를 찾고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 말고 내가 관계를 이어나가야할 사람은 없다. 내가 누군가의 마음속에 차지하는 비중이 없다시피 한 사람과 내가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는 건 마치 우주 어딘가 존재하는 서로 존재를 알 가망이 없는 외계인과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논리나 진배없다."

세상에는 나를 싫어하고 약점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 어떤 사람도 이를 피할 수 없다. 나를 애정하지 않고 나를 싫어하고 반감을 갖는 사람들에게 나를 노출시키는 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나에 대한 공격의 빌미만을 주게 되는 것이다. 내가 왜 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해가며 그런 활동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로 인해 상처받는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고 나를 생각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이다. 나의 시간과 사랑 그리고  호의는 어디까지나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를 싫어했고 싫어하며 앞으로도 싫어할 사람들에게 왜 내가 호의를 베풀어야 하는가?"

페이스북을 끊은지 1년 후 내게 생긴 변화들을 나열해보자면...

우선 수면장애, 잡념이 사라졌고, 붕 뜨는 일상의 시간이 개선되었다. 일의 능률이 올라왔고, 보다 중요한 가치 있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게 되었다. 물론 내 주변의 소시오패스들 상당수를 멀리하게 되었고, 내게 부정적인 영향 혹은 실망감을 안겨주던 개인들도 자연스럽게 차단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긍정적이고 건강한 관계들만 살아남아 복원되었다.

 

결론적으로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고, 1년이 지난 지금도 대만족한다. 끝으로 비슷한 생각이 담긴 김영하 작가의 글을 아래 덧붙이며 나의 페이스북 탈퇴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글을 통해 다른 분들도 페이스북과 같은 타인의 늪, 소셜미디어의 늪에서 빠져나와 진정한 자아를 찾아 행복한 여생을 즐기시길 바란다.

마흔이 넘어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친구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친구를 덜 만났으면 내 인생이 더 풍요로웠을 것 같아요.
쓸데없는 술자리에 시간을 너무 많이 낭비했어요.
맞출 수 없는 변덕스럽고 복잡한 여러 친구들의 성향과 각기 다른 성격,
이런 걸 맞춰주느라 시간을 너무 허비했어요.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읽을걸, 잠을 자거나 음악이나 들을걸, 그냥 거리를 걷던가.
20대, 젊을 때에는 그 친구들과 영원히 같이 갈 것 같고
앞으로도 함께 해나갈 일이 많이 있을 것 같아서
내가 손해 보는 게 있어도 맞춰주고 그러잖아요.

근데 아니더라고요.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은 많은 친구들과 멀어지게 되더군요. 

그보다는 자기 자신의 취향에 귀 기울이고 영혼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드는게 더 중요한 거예요.

 

위에 설명한 것 이외에 알려진 페이스북의 문제점은 아래 나무위키 문서에도 잘 정리되어 있다.

namu.wiki/w/페이스북/논란과%20문제점?from=페인낭

 

페이스북/논란과 문제점 - 나무위키

몇 년 동안 대중을 몰래 감시해온 저희로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거주지와 종교적 정치적 견해, 순서대로 정리한 친구 목록, 이메일 주소, 전화번호, 자신이 찍힌 수백 장의 사

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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