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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고기이야기 ━

내가 물고기를 좋아하게 된 이야기 (2부)

by 하늘종개 2012.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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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물고기를 좋아하게 된 이야기 1부 (http://fishes.tistory.com/160)에 이어서...


물고기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준 가장 큰 '은인', 제대로 말하면 '은사'는 '최기철 박사님'이 틀림없다. 만약 <민물고기>를 비롯한 최기철 박사님의 저서들이 없었더라면 물고기에 대한 관심과 열정의 불씨가 타오를 일은 '절대로' 없었을테니 말이다.


(나 뿐만 아니라 민물고기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들중에 최기철 박사님은 익숙한 이름이다. 최기철 박사님 이전에 한국에서 출판된 민물고기에 대한 대중서는 부산수산대의 정문기 박사님의 저술이 유일했지만, 워낙 오래된 책이고 정보도 지난날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축적한 수준의 정보에 그치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 최기철 박사님의 저서들은 직접 전국에서 조사한 방언과 분포, 생태 그리고 분류에 대한 총체적인 정보들을 대중들의 수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문체로 담아냈다는 것에 그 의미가 컸다. 그리하여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고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었다. 나를 비롯해 90년대 이후 민물고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들이 최기철 박사님의 덕을 톡톡히 보았음을 부정할 이는 없을 것이다. 혹시나 이 글을 읽고 물고기에 대해 더욱 깊게 빠져들고 싶은 입문자가 있다면, 최기철 박사님의 저서인 <민물고기를 찾아서>, <우리가 꼭 알아야할 우리민물고기 백가지>를 꼭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


최기철 박사님의 책은 하나같이 정보들이 풍부했다. 물고기의 이름, 모습에 대한 자세한 설명, 구분하는 방법, 그 당시에 흔치 않은 생생한 사진, 물고기들의 다양한 생활사에 대한 설명, 그리고 후학들에게 던지는 화두들...


이런 자극들이 내가 물고기에게 빠져드는데 일조했다. 나는 초등학생이던 당시에 이 책들을 끼고 살았다. 자기전 베개 옆에 항상 이 책들이 있었다. 물고기들의 이름은 일부러 공들이지 않아도 머리속에 각인되었고, 수업시간에 연습장에 물고기들 이름과 특징들을 쓰기도 했다. 이렇게 책에서 배운 지식들은 곧장 냇가에서 확인이 되었다. 모래무지와 돌마자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책에서 본 뒤 나는 곧장 소양천으로 달려가 그 둘을 잡아놓고 비교하여 책속의 지식을 내 경험으로 체화시켰다.


기르는 것 역시 내게 좋은 경험이 되었다. 베란다에만 두던 어항을 처음으로 방안에 들여놓은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동네 수족관에서 작은 1자짜리 팔각어항을 사서 방안에 꾸며놓고 몇 종의 물고기들을 선별적으로 길렀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집안의 어항은 늘어났고, 수험생이 다 되었을때는 집안에 어항이 10여개에 달할 정도로 늘어났다. 


물고기들은 제대로 된 사육환경에서 길러진다기 보다는 채집되어 어항에 넣어진 뒤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많은 질병을 직접 경험했고, 시행착오가 컸다. 만약 이때에 제대로 된 사육에 대한 서적을 보았더라면 시행착오가 덜 했으리라 생각된다. (아쉽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사육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담긴 가이드북은 없는 상황이다.)


잡아다 서서히 죽이는 과정이 어느 정도 지칠 무렵 물고기를 기르는 나름의 노하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여과의 시스템을 이해했으며, 물고기들의 적정한 수용량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체득한 이후로 물고기를 헛되이 죽이는 일은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어느 수준에서 줄어들 수 있었다.


물고기에 대한 관심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서도 줄어들긴 커녕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PC통신 붐이 일어나고 이윽고 IMF가 닥쳤다. 우리 집은 이에 큰 타격을 입고 두번에 걸쳐 이사를 가야했다. 처음 이사갔던 곳은 그나마 소양천과 가까운 곳이었지만, 두번째 이사가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곳은 소양천과 멀리 떨어진 곳이었고 그 주변엔 소양천과 같은 매력적인 냇가도 없는 형편이었다. 내 마음은 오직 소양천에 꽂혀 있었기 때문에 이사가야 했던 상황은 아쉬움을 크게 했다.


그 와중에 내 아쉬움을 달래줄 일이 2가지 생겨났다. 


내 아쉬움을 달래준 첫 번째 일은 학계의 여러 선생님들과의 만남이다.

최기철 박사님과의 만남은 실제로 꿈까지 꿀 정도의 소망이었다. 당시에 고령이셨기에 나는 만나고 싶다는 생각만 할 뿐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는데, 어느날 인터넷을 통해 최기철 박사님께서 참여하시는 모임이 있다는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그 모임은 '곤민회'였는데, 최기철 박사님과 교류하던 곤충과 민물고기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함께 1999년 창립한 모임으로 거의 매달 한번씩 모여서 발표회도 하고 여러 명사 선생님들을 모셔서 특강을 듣는 학술적 성격의 모임이었다. 나는 즉시 가입했고, 가입 후 몇달이 지나고나서 최기철 박사님을 뵈러 상경길에 올랐다. 최기철 박사님의 저서를 출판한 곳인 현암사의 빈 세미나실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휠체어에 의지하고 계신 최기철 박사님을 만나뵐수 있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숫기가 없었던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질문도 드리고 싶었지만, 인사를 드리고 먼 발치에서 최기철 박사님의 육성과 모습을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연로하셨음에도 눈빛과 목소리는 내가 그동안 공교육을 받으며 선생님들로부터 받지 못했던 마음의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서울까지 올라오는 시간과 비용 그리고 노력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 이후로 2~3번 정도 최기철 박사님께서 참석하신 모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최기철 박사님과 함께한 마지막 모임이 있었던 몇 주 뒤에 최기철 박사님의 부고를 전화로 전달받았을 때 슬픔과 함께 아쉬움이 밀려왔다. 비록 최기철 박사님은 지금은 안계시지만, 방대한 경험들과 기록들이 여러 저서들과 글로 남아서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것은 큰 다행이다.


전북대의 김익수 교수님은 일제강점기 이후 불모지나 다름 없었던 한국 어류 분류학의 기초를 다지셨고, 후학양성과 전문서와 대중서를 골고루 출판하는 활동을 하셨다. 지금은 이사를 가셨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당시에는 나와 같은 동네에 살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전북대를 찾아갔다. 시내버스와 도보로 30분이면 당도하는 곳에 어류를 연구하는 유명한 분이 계시다는 사실이 잘 실감나질 않았다. 처음 연구실에 방문했을 때를 잊지 못한다. 오랜 시간동안 연구했던 물고기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연구실의 구석구석 소개해주셨다. 표본실에는 한국에서 보고된 거의 모든 물고기들의 표본이 진열되고 있었고, 신종을 보고할 때 기준이 되는 모식표본들도 볼 수 있었다. 연구실 건물 구석에 한 방에는 수조들이 가득한 수조실이 있었는데, 보기 드믄 희귀한 물고기들과 연구하기 위해 채집된 물고기들이 사육되고 있었다. 첫 만남에서 김익수교수님은 내게 무려 4시간이 넘는 시간을 할애해 주셨다. 그리고 돌아가는 내 손에 <한국동식물도감 담수어류편>과 여러 편의 논문들을 선물로 주셨는데 그것들은 내가 학문적으로 발돋움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현재도 내 가장 소중한 보물들로 남아있다. 그 후로도 가끔씩 1년에 한번 정도 궁금증이 쌓이면 잘 모아두었다가 찾아뵙곤 했다. 


내 아쉬움을 달래준 두번째 일은 바로 '모임활동'이다. 그 전까진 우리집에 컴퓨터가 없었지만 국가에서 국민PC란 정책으로 컴퓨터 구입에 보조금을 내주게 되어 우리집에도 컴퓨터가 생기게 되었다. 때맞추어 인터넷도 보급되어 정보의 바다에 접속하는 기회가 찾아오게 되었다. 


어느날은 검색창에 민물고기를 검색했다. 대부분은 매운탕과 관련된 정보들이 검색되었지만, 그 중에 민물고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곳이 눈에 띄었다. 즉시 가입했고, 그곳에서 나와 같은 관심사를 갖는 전국의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전까지 내 타자실력은 형편없었지만, 밤 늦게까지 여러 사람들과 채팅방에서 대화를 나누느라 타자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했던 기억이 난다. 서울, 대전, 광주, 대구, 부산, 인천, 춘천, 청주와 같은 전국 각지에서 민물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교감을 나눈다는 것이 내겐 큰 기쁨을 주었다. 그 당시 인터넷 상에는 커뮤니티 사이트 몇 곳과 정보가 있는 홈페이지 몇 곳 그리고 판매사이트 한 곳이 민물고기에 연관된 사이트의 전부였다.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을 하다보니 어느 날은 이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짜고짜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은 광주였던 기억이난다. 그곳 운영자 분께서 광주에 계셨기 때문에 갔던 것이다. 수조에서 길러지는 물고기들을 보고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 그 다음은 충남 금산에서 채집을 겸한 모임에 참석 했었다. 서울, 대전, 과천에서 온 회원들과 1박2일로 채집도 하고 캠핑도 하는 정말 즐거운 모임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모임을 주최하여 섬진강 상류 모처에서 1박2일로 모임을 하기도 했었다. 


여튼 지금 생각해보면 모임활동에 열성적인 것을 넘어서 극성스러웠던 나였다. 어느 날엔 경기도 가평군의 청평면에 소재한 내수면연구소에서 모임을 한다는 공지가 떴고, 그때 많은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생겼다. 여기서 나는 훗날 나에게 큰 도움을 주는 분과 첫만남을 가질 수 있었는데, 미꾸라지를 잡는 어부라고 본인을 소개하신 조성장님이 바로 그 분이었다. 


조성장님은 충남의 대천에 계셨는데 식용 물고기를 잡는 것 외에도 우리나라 물고기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대단하셨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채집에 달인이셨다. 청평에서의 모임은 1박2일 일정이었는데 둘째날에 청평을 흐르는 조종천에서 채집을 하는 일정이 있었다. 물이 얼어붙은 추운 겨울날이었음에도 그물로 능수능란하게 물고기들을 잡아내는 모습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모임이 있은 후로 수시로 조성장님과 채팅과 글로서 정보를 나누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수험생 즈음부터는 함께 채집을 가는 일이 자주 생기게 되었고, 나중엔 아예 내가 대천에서 살다시피 하며 전국에 채집다니는 보조 역할을 자청하기도 했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채집경험의 대부분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앞서 설명한 '곤민회'활동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곳에는 민물고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많은 또래 학생들이 주축이었는데, 그들은 과학전람회를 비롯해 전략적으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일부는 가시적인 성과로서 이 방면으로 탁월한 두각을 나타내는 이도 있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가끔 모임에 참석하면서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는데 가장 큰 소득은 자칫 박물학적 수준에 머물 수도 있었던 나의 지적인 갈증을 더욱 깊이있게 파고들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대학생도 아닌 학생들 모임에서 생물학 전공자 조차도 모르는게 다반사인 '포괄적응도'나 '핸디캡 이론' 따위의 개념을 주제로 한 토론이 진행되었고, 전공자들도 구하기 어려운 교재들을 구해다가 읽고 토론하기도 했다. 이 당시에 행동생태학에 대한 관심이 싹트게 되어 지금의 전공이 되기도 했고, 곤민회에 특강으로 참석한 박사님께서 지금의 나의 지도교수님이 되기도 했다. 그 정도로 곤민회가 내 학문적 욕구에 미친 파장은 컸다.


이처럼 초등학교 말부터 수험생이 되는 시점까지의 다채로운 경험들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내는 밑그림이 되었고, 이때의 경험은 정말 소중했다.


하지만... 이 당시에 물고기에 대한 여러 경험을 쌓는 동안 좋은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모든 현상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었고, 3부에선 과연 저 시기동안 어떤 그림자가 있었는지 짚어보기로 하겠다.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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