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잡담 ━

2022년 대선을 바라보며: 예견되었던 현재와 다시 예견하는 미래

by 하늘종개 2022. 3. 10.
반응형

2022년 대선도 마무리 되었다. 한국 사람들 대부분의 선택은 윤석열이었다. 살면서 경험한 몇 안되는 대선이지만, 이번 대선은 참 특이했다. 그리고 재미있었던 점은 내가 2010년대 중반에 20대 세대들을 바라보며 예견했던 몇 가지 일들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1. 젊은 세대들은 갈등의 중심으로 부상할 것이다.

2. 대부분의 젊은 세대는 기대와 현실이 괴리된 원인을 스스로가 아닌 외부에서 찾을 것이다.

3. 문제의 본질적 맥락 그리고 그것의 근원적 해결방안은 외면받을 것이다.

 

세가지 현상은 긴밀히 연결되고 일부 선동적인 정치인들에 의해 증폭되었다. 그것을 증폭한 책임을 져야할 사람들은 2번 그리고 3번 항목 덕분에 추후 책임에서 벗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사람들은 문제의 원인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지도 그리고 책임을 마땅히 져야할 사람에게 묻지도 않을, 아니 못할 것이다.

 

내 20대는 진보와 보수정권의 격동을 모두 경험했었다. 그 경험은 가슴이 시릴 정도로 극적이었다. 이런 일이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너무 가혹하고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거대한 조류를 한낯 파도가 바꿀 수 있을까? 이제는 납작 엎드려 나와 우리의 안녕을 도모해야 하는 시대가 다시 시작되었다.

 

새로운 시대에 앞으로 몇년 동안의 변화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 역사속에 해답이 있을 것이다.

 

생물의 세계에서 극단적 성간갈등 (sexual confilct)은 적대적 성선택 (antagonistic sexual selection)을 유발한다. 따라서, 지금 한국 사회에서 나타난 극단적 갈등은 성간에 적대적인 전략들을 다양화, 고착화 시킬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불행하게도 배우자에 대한 관념과 이상이 적어도 30%의 남성에겐 타의로 바뀌게 될 것이다. 생물학적인 본능이 타의로 거세된 사람들은 극단적인 행동을 표출할 가능성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높은 경향이 있다. 사람은 배고플수록 화를 내기 쉽고, 달콤한 케이크를 먹으며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는 앞으로 수십년간 한국 사회의 갈등의 핵심화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애석하지만 이것이 해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그 분노의 화살촉을 피할 방도를 마련할 수 밖에...

 

반-과학이 하나의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 될 것이다. 혈액형 성격론의 유행이 지나자 과학적인 근거가 빈약한 MBTI 유형론이 한국사회에 유행하고 있다. 내가 머무는 해외에서 여러 국적 출신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해도 도무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그 유형론을 한국에서는 이제 누구나 진실인양 따르고 있다. 스스로 근거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상을 여러 곳에서 목도하고 있다. 이 현상은 백신과 과학방역지침에 대한 거부운동으로 현실에서 이미 발현되고 있다. 기후변화에 대해 젊은 세대의 인식을 보여준 최근 모 언론의 기획기사는 과학적인 근거가 얼마나 처참하게 외면받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금 형성된 관념은 두고봐야 알겠지만, 고정관념으로 고착화될 가능성이 높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 상황의 해결을 위해서는 막스플랑크가 말했던 그 유명한 경구를 따라야 할지도 모른다. 

 

혐오와 차별의 미덕화. 혐오는 성공했고 이제 다수의 가치관으로 안착되었다. 약자에 대한 혐오를 일삼는 사람이 다수라면 과연 누가 정신 나간 사람일까? 정상은 그들이고 어쩌면 약자 혹은 약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나머지 사람들이 비정상 아닐까? 슬프게도,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기에, 다수의 입장을 옳은 입장이라고 믿는 경향이 높은 편이다. 중도에 있던 사람들이 다수의 입장에 편승하는 모습을 종종 보곤 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혐오는 이제 더 이상 소수에 의한 혐오에 그치지 않고 다수에 의한 혐오로 일상화 된다. 그리고 논리와 명분이 더해져 미덕으로 진화하기도 한다.

 

한번 쇳덩이에서 칼로 가공되고나면, 그 칼은 누군가를 심각하게 다치게 하거나 죽게할 수 있다. 사람들을 칼날같이 두려운 혐오중독자로 변모시킨 악마나 다름없는 인간들은 정작 죽는 순간까지 그 칼에 맞을 일이 절대 없다. 역사속 학살자들의 생애를 봐도 잘 알 수 있다. 피해는 그 칼날을 품은 혐오자들 주변의 선량한 시민들뿐이다. 

 

3S정책의 부활? 뭐 묻는 개가 겨묻은 개를 나무랄때, 뭐 묻은개가 그 상황을 모면하는 방법은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다. 아마 역사속에서만 보았던 그 전설적인 정책이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마취시킬 것이다. 사람들의 그릇된 욕망을 부추기고 해소시켜주는 방향의 정책들이 전방위적으로 쏟아져나와 시민들의 혼돈을 부추길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홍수가 닥칠 것이 예상될 때의 대처법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 능동적인 대처법은 둑을 높이 쌓고, 배수로를 정비하는 것.

- 수동적인 대처법은 고지대로 이사하는 것.

쉽게말해, 쏟아지는 비를 막을 수는 없으니 피하거나 나와 공동체의 안녕을 대비하면 된다.

 

더 구체적인 전략은 아래와 같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잠수함전략'

 

잠행

수면 위로는 거센 폭풍과 해일이 만연하고 있다. 하지만 수심 깊은 곳은 안전하다. 앞으로 화살촉 같은 인간들은 자신들을 억압했던 대상이 아니라 약자들에게 혐오를 배설하고 그 혐오를 기꺼이 정당화할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소중한 모든 것들을 이끌고 그들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곳으로 잠수하자. 그들의 눈에 띄지 않고, 분노와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숨어서 살아남아야 한다. 오히려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인양 보호색을 갖추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지도 모른다. 

 

교란

잠행을 아무리 성공적으로 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순간은 의외로 쉽게 찾아온다. 과거 10년동안의 보수정권 하에서 봉준호와 같은 창작자, 과학자들에게 사상검증과 집요한 물고늘어지기를 했던 것은 잠행조차도 쉽지 않음을 잘 드러낸다. 따라서, 성공적인 잠행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교란전략이 요구된다. 혐오에 눈이 먼 사람들을 교란시키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지만, 굳이 이곳에 소개하진 않을 것이다.

 

동맹

인류역사에 손꼽을 명장 이순신 조차도 1척의 함선으로는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10명은 1명보다 낫다는 사실은 너무도 자명하다. 100명은 말할 것도 없다. 잠행하며 공감대를 공유하는 동맹을 구축하는 것은 오래 살아남는데 필수적임은 두 말할것 없다.

 

잘들 살아남으시길 바란다. 아마 이번에는 꽤 오래갈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반응형